KASS 은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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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SS 은비이야기

  1985년생 조은비

 

  열아홉 번째 생일을 며칠 넘긴 어느 날 일본에서 처음으로 엔젤만증후군(Angelman Syndrome: 이하 AS)이라는 질환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은비의 행동이나 특성들이 아무래도 뇌성마비가 아니라 엔젤만증후군에 가까운 것 같다는 것이 그 곳 선생님들의 조심스러운 소견이었습니다.

 

  엔젤만증후군!

 

  우리 부부는 난생 처음 듣는 질환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AS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고는 ‘악’ 소리가 나도록 경악했습니다. 판단 증세가 마치 지금까지 은비가 겪은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착각이 들만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는 사이트에 올려진 아이들의 표정이나 웃는 모습들이 은비의 어린 시절 모습과 너무나 똑같아 보였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우리 부부는 이미 은비는 분명히 AS일 것이라는 확신감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비로소 은비에 대해서 진정한 이해를 할 수가 있더군요.

 

  AS는 염색체 결실로 인한 유전질환의 하나입니다. AS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이 병이 대부분 모계 유전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혹시라도 부모가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이야기해주는 선생님의 태도는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선입견이나 자존심 때문에 진실을 알기를 주저한다면 그건 아이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아이의 상태를 직시하고 정확한 병명을 아는 것이야말로 치료를 위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전자 치료를 비롯한 생명공학 분야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별다른 치료 방법이 없을지라도 다가 올 미래의 어느 날인가는 반드시 그 치료법도 개발되고 발견되리라 믿습니다.

 

  AS는 전반적인 발달장애를 일으키는데 경련과 섭식 장애 , 사시 , 운동 실조로 인한 신체장애, 정신지체, 언어 장애, 감각통합기능의 장애, 척추 측만 등 다양한 장애를 유발시킵니다. 물론 상태에 따라서 이 중 몇 가지만 가볍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혹은 거의 모든 장애를 다 수반할 만큼 중증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중 은비의 경우는 심각한 위 식도 역류 현상으로 수술을 받았으며, 폐렴, 중이염, 편도선염 등 각종 병치레를 반복해 왔습니다. 경련성 사지마비라는 진단을 받을 정도로 근 긴장도가 심해 운동성에 있어서도 정상적인 발달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빈번한 경련과 지능장애, 언어장애, 심한 척추 측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불행하게도 거의 모든 장애를 다 구비하고 있는 중증 장애인입니다.

 

  병명을 알 수 없어 뇌성마비로 진단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은비는 척추의 심한 불균형으로 인하여 우리나라에서 받기 힘들었던 수술을 일본에서 받게 되면서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아이의 많은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은비는 지체장애(정확히 말하면 뇌병변 장애)와 정신지체에서 각각 1급 판정을 받은 중증 뇌성마비 장애아였습니. 이제 1급 중증의 ‘엔젤만증후군’ 환자로 바뀌어야겠지요.

 

  돌이켜보면 끝없이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아이를 때로는 그냥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시간들은 무기력한 자신과의 기나긴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단순하게 체념하고 운명에 맡기기보다는 늘 맞서서 극복해보려 했지만 아이의 고통을 전부 덜어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방긋방긋 웃어주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모습에서 경이로움을 느껴온 것도 사실입니다(비록 그것이 AS의 한 특성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AS를 앓고 있을 어린 아이들이 은비와 같은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랍니다. 은비는 매우 중증의 AS 환자라고 생각됩니다. 정도의 차이가 심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AS 환우들이 은비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글이 아직까지 아무 것도 모른 채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또 다른 환우들과 가족들에게 병을 이해하고 대처해 나가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지금도 장애를 가진 아이들 중 중증의 장애를 갖고 있는 많은 아이들은 자신의 정확한 병명을 모른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그것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뚜렷한 치료 방법이 없다면 알고 있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생각이지요. 물론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이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혹은 치료법이 발견되었다 해도 고칠 수 있는 시기도 먼 훗날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치료는 병명을 알아야만 비로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학적인 치료가 아니더라도 다른 면에서의 치료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엔젤만증후군을 앓는 아이들에겐 그 중 중요한 것이 교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은 아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또 하나의 모티브입니다. 아이의 특성과 행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을 때는 때론 맞지 않는 교육법으로 아이와 힘든 시간을 싸워나갔지만 선배들이 연구하고 밝힌 자료를 참고 삼아서 접근해 나간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고 늘 긴장감을 잃지 않고 인생을 도전하며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음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작지만 소중한 것들이 삶 속에는 얼마나 많은지 오늘도 은비는 우리에게 그렇게 일깨워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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